부분과 전체
3. 현대 물리학의 '이해'라는 개념(19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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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외적인 영향과 무관하게 유지되는, 참으로 기이한 물질의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역학이나 천문학에는 생소한 추가적인 요청이 따라야 했다. 1900년 플랑크가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그런 요청은 양자조건*이라 불렸다. 이런 요청은 수의 신비에 속한 요소들을 원자물리학으로 들여왔다. 궤도에서 계산할 수 있는 물리량은 기본 단위, 즉 플랑크 작용양자**의 정수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 1913년에 제안된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는 원자핵 주변에서 전자들이 아주 작은 태양계처럼 돌고 있지만, 특정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궤도만 허용된다. 그럼으로써 원자의 분광스펙트럼에서 볼 수 있는 흡수선이나 방출선의 파장이나 진동수를 설명할 수 있다. 이 파장이나 진동수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양자화되어 있다고 하고, 그러한 조건을 양자화 조건 또는 양자조건이라 부른다.
** 박스 플랑크는 뜨거운 물체에서 복사되는 에너지의 파장별 분포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특정 파장(또는 진동수나 색깔)의 에너지의 값이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양의 정수배만 가능하다는 가설을 세웠다. 아인슈타인은 그 기본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한다고 가정하고 이를 광양자라 불렀다. 이때 기본 에너지와 진동수의 비가 작용양자 또는 플랑크 상수이다. 그 단위는 에너지와 시간을 곱한 값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흑체복사를 비롯하여 여러 원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양자론의 출발점이다.
4. 정치와 역사에 대한 교훈(1922~1924)
p63
이런 에피소드가 나중에 닐스 보어와의 대화에서, 그리고 과학과 정치 사이의 위험한 영역에서 나의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일은 물론 처음에는 깊은 실망으로 다가왔고 과학의 의미에 대해 의심을 하게 했다. 학계에서조차 진리가 아니라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이 판친다면, 과연 과학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 일일까?
p68
"(…) 그는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고, 휩쓸려 가는 것이며 세뇌당하는 것임을,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생각해야 했을까요? 어떤 심급에 대체 이렇게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정치의 연관성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고, '사라예보의 암살' 또는 '벨기에로의 진격'과 같은 이해하기 힘든 개별적인 사실만 듣고 있는 젊은이의 이성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8. 원자물리학과 실용주의적 사고방식(1929)
p142
나는 전체의 등반 코스가 결정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올바른 코스를 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개별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바위산 비유의 오류는 바위산이 정말 오를 수 있는 산인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자연 속의 연관이 결국은 단순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자연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 능력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전에 슈타튼베르크 호숫가를 걸을 때 로베르트가 했던 말에 근거했다. 그때 로베르트는 자연을 이 모든 형태로 조성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우리의 정신 구조, 즉 사고 능력의 구조 또한 만들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폴은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 있어"라고 말했고, 나는 정확히 반대로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는 없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 한편 내 말은 한 가지 어려움을 진정하게 해결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만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단순하고 커다란 연고나에 다다르면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어려움들까지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닐스 보어가 곧잘 하는 말을 떠올리면서 둘 사이의 모순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닐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잘못된 주장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다시금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