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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숙과의 대화

s0mersault 2025. 2. 18. 10:12

p63 음악의 구조 안에는 클라이맥스가 항상 있죠. 저는 그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아무리 이성적으로 곡을 써도 구조 안에서 감정의 절정이 듣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잖아요. 직접 다가가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작품에는 어떤 곡이든 그 부분이 항상 있어요.

 

p261 <권두곡>은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재밌다는 느낌을 받았던 작품이에요. 여러 작곡가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의 곡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음악적인 에센스를 가져다 조합해서 쓰는 거죠. 예를 들어 중간에 현악기만 조용히 나오는 부분은 브루크너 심포니를 찰스 아이브스 스타일로 조합했고, 또 다음 블록에는 그리제이가 나오고 다시 브루크너가 나오는 식으로, 한 작곡가의 곡을 아이브스같이 작업한다거나, 차이콥스키 6번 교향곡과 불레즈의 <노타시옹>을 위아래로 합치는 등의 작업을 하면서 아주 재밌었어요. 그리고 음악의 변화가 많잖아요. 조용하다가 갑자기 역동적으로 바뀌는데, <로카나>를 인용한 부분도 있고, 그다음에 완전히 해방되듯이 베베른의 <파사칼리아>도 나와요.

 

p280 그리고 파울리가 계속 꿈을 꾸는데, 꿈 때문에 자지가 너무 힘들지만 거기서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오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 꿈을 해석하기 위해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갔고, 두 사람이 꿈을 해석하며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내 생각에는 이 사람이 남들한테 얘기하진 않았지만 어떤 희망을 가졌던 것 같아요. 과학자/물리학자라는 사람들이 그렇거든요.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이 알겠지만, 결국 자신들이 학문으로 깰 수 없는 우주의 진짜 비밀, 마지노선이 있어요. 아무리 많이 연구하고 많이 알아도 정말로 풀 수 없는 비밀이 있거든요. 파울리가 계속 주변 과학자들을 도와줬고 그들이 노벨상을 타기도 해서 너무나 존경받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풀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스스로 알죠. 직감으로 아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깨야 자기가 더 최고의 과학자가 돼요. 진짜 우주의 비밀을 푸는 꿈을 모든 물리학자가 갖고 있는데, 파울리는 인간으로서 그 일을 할 수 없지만 자기 꿈을 통해서, 자기 꿈을 분석함으로써 그 열쇠를 얻으려고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최소한 그에 대한 희망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p290 아무래도 곡이 진짜로 발전되는 건 일단 쓰면서부터고요. 처음에 원했던 아이디어를 훨씬 구체적으로 펼쳐 가지만 잘 안 되기도 해요. 그 아이디어와 음악적인 재료들의 물리학이 다르니, 구체적으로 음을 쓰고 음악이 진행되면서 그 재료들과 써 놓은 음악이 자기가 갈 수 있는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는 부분이 확실히 있다고 생각해요.

(…)

내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했고, 클래식부터 시작했잖아요. 작곡을 하기 위해 현대음악부터 시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한테 음악은 항상 옛날 전통 음악같이 흐름이 있고 박동이 있는 거예요. 아무리 느리고 파편으로 쓴 음악이라도 큰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게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 있었어요. 그리고 나한테 음악이라는 건, 유럽에서는 다소 오해를 받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어떤 감정의 흐름을 담고 있고, 절박하게 내가 청중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겠다는 의지와 힘을 가지고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 처음이 시작해서 끝까지 쭉 힘을 가지고 가죠.

(…)

음악 안에서 사람들을 쥐었다 놨다 하면서 긴장감을 끌고 가는 건 결국 타이밍, 시간에 관한 감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그런 것도 있고.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악보 위에서 어떤 음악적 재료로 나오는데, 그것이 얼마만큼 강한지, 내가 그걸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얼마만큼 강한지와 상당히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