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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3~1216

s0mersault 2021. 12. 13. 16:44

「자제 대 패권: 탈냉전기 미국 대전략의 이해」 (이혜정, 2015)

 

p4 민주주의 영국제국의 상황은 달랐다. 제국의 경제적 기반은 초기의 산업생산 능력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상업과 금융으로 옮아갔다. 이를 지키는 주요한 수단은 해군력과 패권경쟁국의 출현을 막기 위한 세력균형 외교였다. 해상수송로의 보호 등 해군의 작전은 전쟁과 평화의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

 

p5 미국에게도 이 세 가지(민주주의 정치체제,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의 경제적 이익, 국제체제의 지정학적 질서에서의 자신의 지배)의 조화가 국가 대전략의 핵심과제였다. 이에 대한 미국적 해법은 1945년에서 1953년 사이에 두 가지 기제를 통해서 마련되었다. 국가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와 봉쇄전략이 그것이었다. 전자는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허물고 대외정책과 국방정책은 물론 국내정치에서의 이념적 통제까지도 포괄하는 안보 개념을 제도화하였고, 후자는 소련의 위협을 전면에 내세워 세계자본주의를 재건하는 패권기획을 정당화했다. 미국의 대전략으로서 패권은 봉쇄를 명분으로 하고, 국가안보국가를 그 제도적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트루먼, 1952.12.19. "미국외교의 회고(U.S. Foreign Policy in Review)" : 소련의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 아닌 '긍정적, 창조적, 건설적'인 것이었음. 1947~48 전후의 현실에 맞는 트루먼독트린, 마셜플랜, 일본 재건 등 새로운 청사진 →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제도화 (..) 하지만 그의 회고는 냉전의 기원을 소련의 팽창정책에 두고 있는 정통주의 시각과는 배치되며,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며 마셜플랜이나 일본 재건을 추진했던 자신의 수사와도 배치된다.

영국과 비교하면 대륙규모의 연방국가인 미국은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낮다. 산업부문의 경쟁력을 상실하고 무역과 금융으로 경제적 이익의 중심을 옮긴 영국과 달리, 미국은 상대적으로 산업과 무역, 금융 전 부분의 경쟁력을 균형적,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 미국 국내정치에서 국제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또한 유럽의 강대국정치를 경험하고 현실주의적 치국술에 대한 이해를 지닌 영국과 달리, 미국은 유럽제국주의 세력을 제외하면 지역의 강대국이 부재한 예외적 환경에서 일방주의 외교 전통을 키워왔다. 미국의 국제주의 혹은 패권주의자들이 패권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국가주의 세력을 설득해야 했고, 소련은 이를 위한 유용한 위협이 되었다.

 

p8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압도적 지위는 역사적 예외로, 미국의 상대적 경제적 쇠퇴는 필연적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경제의 상대적 이득을 확보하는 개별 국가차원의 국익과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안정적 관리라는 패권국가의 과제는 상호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의 비극이 증명하듯, 봉쇄를 명분으로 한 미국의 제3세계 개입은 전반적으로 실패로 귀결되었다. (..) 냉전 시기 미국의 개입은 폭과 내용면에서 부침을 거듭했다. 첫 번째 감축 혹은 축소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NSC-68의 대규모 재무장정책에서 한국전쟁의 종식과 뉴룩으로 전환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닉슨 정부가 베트남에서의 철군과 중소분쟁을 활용한 데탕트를 추진한 것이었다. 양자 모두 개입에 대한 국내의 정치적 저항이나 지지의 상실과 재정적 압박이 작동했지만, 후자의 경우 개입의 장애와 감축의 후유증이 훨씬 심각했다. 베트남은 미국 민주주의, 세계 자본주의, 그리고 안보의 세 영역에서 모두 위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한 사례였다. 그 대표적인 시기는 베트남에서의 구정 공세가 증명하는 개입의 실패, 미국경제의 상대적 쇠퇴를 보여주는 달러 위기, 그리고 현직 대통령의 재선 불출마 결정과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의 시위 사태가 대표하는 국내 정치적 위기가 중첩된 1968년이다. 반전운동의 여파로 징병제가 폐지되고 모병제가 시행되면서 군사개입의 물적·제도적 기반이 침식되었다. 베트남 철수 협상에서 닉슨의 비밀주의가 결국 워터게이트로 이어졌다고 본다면 헌정질서의 위기 역시 베트남이 남긴 상처였다.

닉슨의 데탕트정책은 역설적이게도 같은 공화당의 반발을 촉발했다. 데탕트에 대한 반발은 민주당을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이 신보수주의로 거듭나는 결정적 계기였다. 레이건은 데탕트에 반대하는 신보수주의의 지원을 배경으로, 도덕외교를 내세우며 미국의 기존 안보정책과 안보기구 전반의 개혁을 추구했던 카터에 압승을 거두었다.

(..) 특히 레이건의 경우 "유능한 궁수" 이후 대소 군사적 대결에서 협상으로의 "반전"(Reagan Reversal)"을 연출하며 고르바초프와의 협상을 통해 냉전의 평화적 종식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케네디와 레이건의 외교적 업적은 전면적 개입과 대결이 아니라 자제와 협력의 산물이었다.

 

p13 자제-역외균형론 내부는 다시 1990년대부터 논의를 일관되게 전개해오고 있는 원조 자제-역외균형론과 이라크 전쟁 이후에 합류한 현실주의 역외균형론으로 나뉜다. 이 논쟁에서 핵심적인 이론적 쟁점은 단극시대 미국패권의 안정성이고, 역사적 쟁점은 미국패권 혹은 외교의 전통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정치적·정파적 쟁점은 미국 민주주의의 성격 혹은 현황, 구체적으로는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민주적 정책 결정 여부이다.

p14 비록 부시정부의 이라크 전쟁이 패권의 자유주의적·제도적 기제와 그 이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실수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 확산 기획 자체는 미국이 추구해야 하는 필수적 과업이라는 것이다. (..) 이들의 미국패권 예외주의적 시각에서 자제-역외균형론은 미국패권의 긍정적 기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그 핵심기제인 동맹의 포기를 주장하는 무책임한 전면적 감축 주장이자 미국 리더십 자체의 포기 주장에 다름 아니다.

p16 과연 이라크 전쟁은 신보수주의가 외교정책 결정 과정을 장악하면서 생긴 예외적인 경우인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그런 파국적인 결정이 허용되는가? 안보와 미국의 리더십, 신뢰성의 문제 등에서 신보수주의와 자유주의적 패권의 구분은 과연 가능한가? (->놉)

 

p18 역사적 분석의 초점은 대전략은 세계자본주의와 국제안보질서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민주주의체제와 조화시키려는 영국과 미국의 패권전략으로, 이 세 가지 요소의 긴장이 대전략의 역사적 진화를 결정해왔다는 것이다. / 자제-역외균형론은 1990년대부터 미국패권의 대안을 모색한 자유지상주의와 이라크 전쟁 이후 부시정부의 일방주의가 미국에 대한 견제를 불러왔다는 현실주의의 비판이 결합된 것이다. 패권-동맹론은 단극시대 미국패권 예외주의로, 이는 단극체제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일부 현실주의자들과 미국패권의 자유주의적·제도적 기반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패권론자들이 연합하여 주장하는 바이다. 대침체의 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자제-역외균형이 부상하자, 세력균형이 미국패권에 적용되느냐의 여부와 동맹의 비용과 이익을 둘러싸고 자제-역외균형 대 패권-동맹의 본격적인 논쟁이 불거졌다. 전자는 세력균형의 법칙성과 동맹의 비용을 강조하고, 후자는 미국패권의 예외적 안정성과 동맹의 이익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