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책

바냐 아저씨

s0mersault 2022. 12. 20. 15:24

20221220 ~ 20221223

 

나는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다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의 유모뿐이죠. 옛 기억 때문에. 농부들은 아주 무디고 무식하여 지저분하게 살고있고, 인텔리들과는 잘 지내기 힘들죠. 피곤하답니다. 그들 모두는 우리의 친구들이긴 하지만,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깊지 못해 자신의 코 너머도 못 보고, 그저 어리석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좀 더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히스테릭하고, 분석과 성찰에 망가져 버렸죠……. 이런 사람들은 불평하고, 미워하고, 병적으로 비방하며, 삐딱하게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이렇게 단정합니다. <아, 미쳤군!> 아니면 <허풍선이야!> 그리고, 내 이마에 어떤 꼬리표를 붙일지 모르겠으면 <이상한 사람이야, 이상해!> 하고 말하죠. 내가 숲을 사랑하는 것도 이상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자연과 사람에 대한 솔직하고 순수하며 자유로운 관계가 이미 없어졌습니다…….

 

힘겨운 생존 경쟁에 따른 퇴화뿐입니다. 게을러서, 무지해서, 자각하지 못한 데서 오는 퇴화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병든 사람이 남은 삶을 건사할 요량으로, 자기 자식들을 돌볼 요량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배를 채우고 몸을 녹이기 위해서, 내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그 모든 걸 파괴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흔일곱이야. 예순까지 산다 해도 13년이나 남았어. 길어! 13년을 어떻게 살지? 뭘 하면서 그걸 채운단 말이야? 알겠나……. 알겠나, 남은 인생을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맑고 조용한 아침에 눈을 떠,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됐다는 걸, 지난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져 잊혀진 걸 느낄 수만 있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 얘기해 줘, 어떻게 시작하지…… 무엇으로 시작하지…….

 

모르겠습니까, 이 세상에 당신이 할 일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인생의 목적도 없고, 마음을 끄는 것도 없습니다. 늦든 빠르든 결국 감정에 굴복할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러니 하리꼬프나 꾸르스끄 그 어디보다도 여기 자연의 품속이 더 나을 겁니다……. 적어도 시적이고, 가을이 아름답고……. 여기에는 숲도 있고. 뚜르게네프풍의 반쯤 무너진 지주들의 저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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