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책 10

이반 일리치의 죽음

p72 이반 일리치를 제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왠지 모두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아플 뿐 죽어 가는 것이 아니며, 잠자코 치료를 잘 받으면 뭔가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묵인하는 거짓말 말이다. 그는 무슨 짓을 하든 더 괴로운 고통과 죽음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를 괴롭힌 것은 거짓이었다. 즉 모두가 그들 자신도 알고, 그도 아는 사실을 부인해 가며 오히려 그의 끔찍한 처지를 두고 거짓말을 하려 들 뿐 아니라, 그에게마저 거짓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거짓, 그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 일어나는 저 거짓, 저 무섭고 장엄한 죽음이라는 사건을 병문안과 커튼과 만찬의 철갑상어 수준으로 격하해 버리는 저 거짓이야말로…… 이반 일리치는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묘한..

Archive/책 2025.05.25

진은숙과의 대화

p63 음악의 구조 안에는 클라이맥스가 항상 있죠. 저는 그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아무리 이성적으로 곡을 써도 구조 안에서 감정의 절정이 듣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잖아요. 직접 다가가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작품에는 어떤 곡이든 그 부분이 항상 있어요. p261 은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재밌다는 느낌을 받았던 작품이에요. 여러 작곡가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의 곡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음악적인 에센스를 가져다 조합해서 쓰는 거죠. 예를 들어 중간에 현악기만 조용히 나오는 부분은 브루크너 심포니를 찰스 아이브스 스타일로 조합했고, 또 다음 블록에는 그리제이가 나오고 다시 브루크너가 나오는 식으로, 한 작곡가의 곡을 아이브스같이 작업한다거나, 차이콥스키 6번 교향곡..

Archive/책 2025.02.18

아버지와 자식

p179 말해 봐요. 어째서, 우리는 가령 음악, 멋진 야회, 호감 가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길 때조차, 어째서 그 모든 것을 현실의 행복, 즉 우리 자신이 소유한 그런 행복이라기보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떤 무한한 행복에 대한 암시로 여기는 걸까요? 그건 왜죠? 혹시 그런 것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나요? p249 '혹시나' 하고 뜻밖의 행운을 기대하는 젊은이의 마음, 행복을 맛보고 누구의 보호도 없이 혼자서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픈 은밀한 욕망이 결국 승리했다. p275 저마다 상대방이 자신의 속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친구 사이에는 이러한 자각이 즐겁다. 그러나 서로 원수진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자각이다. 특히 서로 대화를 나눌 수도, 헤어질 수도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p2..

Archive/책 2024.10.04

부분과 전체

3. 현대 물리학의 '이해'라는 개념(1920~1922) p50/339 그리하여 외적인 영향과 무관하게 유지되는, 참으로 기이한 물질의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역학이나 천문학에는 생소한 추가적인 요청이 따라야 했다. 1900년 플랑크가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그런 요청은 양자조건*이라 불렸다. 이런 요청은 수의 신비에 속한 요소들을 원자물리학으로 들여왔다. 궤도에서 계산할 수 있는 물리량은 기본 단위, 즉 플랑크 작용양자**의 정수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 1913년에 제안된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는 원자핵 주변에서 전자들이 아주 작은 태양계처럼 돌고 있지만, 특정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궤도만 허용된다. 그럼으로써 원자의 분광스펙트럼에서 볼 수 있는 흡수선이나 방출선의 파장이나 진동수를 설명할 수..

Archive/책 2023.08.29

음악의 시학

1. 음악적 고백록 p13 실제로, 창작 현상은 그 현상의 존재를 드러내는 형식과 따로 떼어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형식 과정은 어떤 원리에서 나오고, 그 원리를 공부하려면 바로 그 교의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 보자면요, 질서가 혼돈을 제압하게 하려면, 불확실한 생각과 수많은 가능성이 얽히고설켜 있는 와중에 작업이라는 한 줄기 직선을 끌어내려면, 일종의 교조주의가 필요합니다. p15 나는 그저 사적인 견해들의 합이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하고 검증했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분명히 유효한 사실들의 합을 전달할 겁니다. (…) 설명한다는 것은 기원을 발견하고, 사물들 간의 관계를 확인하고, 명쾌하게 밝히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p19 체스터턴은 술집 주인에게 혁명의 본래..

Archive/책 2023.06.26

카탈로니아 찬가

p46 사실 의용군이 전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 규율의 힘 덕분이다. 1937년 6월 무렵까지는 계급에 대한 충성심 외에 그들이 전장에 그대로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개별적인 탈주자들은 총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따금씩 총살이 집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1000명이 병사들이 전선을 떠나기로 작정했다면, 그들을 막을 힘은 없을 것이다. 징집병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경우, 헌병이 없었다면 군대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은 전선을 지켰다. p74 첫째, 프랑코는 엄격하게 말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비교될 수 없었다. 그의 봉기는 귀족과 교회의 지원을 받은 군사적 폭동이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특히 초기에는, 파시즘을 강제하려 하기보다는..

Archive/책 2023.06.21

자유론

p91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사상가의 첫 번째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없다. 진리와 관련해서 인류가 점점 더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미 옳다는 것이 증명된 의견들을 늘 좇아가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갖춘 후에 스스로 사고해 나가다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범하는 사람들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하는 것이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유일하거나 주된 목적이 아니다. 도리어 그런 목적 못지않게,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적인 수준을 가능한 한 최고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사상의 자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훨씬 더 필..

Archive/책 2023.04.16

바냐 아저씨

20221220 ~ 20221223 나는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다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의 유모뿐이죠. 옛 기억 때문에. 농부들은 아주 무디고 무식하여 지저분하게 살고있고, 인텔리들과는 잘 지내기 힘들죠. 피곤하답니다. 그들 모두는 우리의 친구들이긴 하지만,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깊지 못해 자신의 코 너머도 못 보고, 그저 어리석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좀 더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히스테릭하고, 분석과 성찰에 망가져 버렸죠……. 이런 사람들은 불평하고, 미워하고, 병적으로 비방하며, 삐딱하게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이렇게 단정합니다. 아니면 그리고, 내 이마에 어떤 꼬리표를 붙일지 모르겠으면..

Archive/책 2022.12.20

떨림과 울림

p90 컴퓨터와 인공지능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원리는 다르다. 사실 그 다름은 뉴턴역학과 해밀턴역학의 차이와 비슷하다.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앨런 튜링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0'과 '1'의 비트로 표현된 데이터를 하나씩 읽어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튜링기계라 한다. 이 순차적 작업 리스트가 알고리즘이고, 이것을 만드는 과정이 코딩이다. 튜링기계는 수학이 하는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튜링기계인 컴퓨터는 뉴턴의 기계적 인과율에 따라 작동된다. 한순간 하나의 비트를 읽어서 명령어에 따라 시간 순서로 철컥철컥 일을 처리한다. 튜링보다 앞서 비슷한 아이디어를 생각한 사람은 찰스 배비지였다. 배비지는 실제로 톱니..

Archive/책 2022.11.13

평화의 경제적 결과

p105 사실,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불행하게도 정치적 고려가 경제적 고려를 방해하고 있다. 무역과 경제적 교류가 자유로이 이뤄지는 체계에서는 철이 정치적 국경의 이쪽에 있고 노동과 석탄, 용광로가 저쪽에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들고 서소를 빈곤하게 만들 방법을 고안해내고 개인적 행복보다 집단적 증오를 더 선호한다. 유럽 자본주의 사회가 현재 보이고 있는 열정과 충동에 따르면, 유럽의 철 생산은 (감정과 역사적 정의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적 국경 떄문에 감소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민족주의와 각국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국경을 따라 새로운 경제적 국경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p144 그럼에도, 유럽은..

Archive/책 2022.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