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악적 고백록
p13 실제로, 창작 현상은 그 현상의 존재를 드러내는 형식과 따로 떼어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형식 과정은 어떤 원리에서 나오고, 그 원리를 공부하려면 바로 그 교의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 보자면요, 질서가 혼돈을 제압하게 하려면, 불확실한 생각과 수많은 가능성이 얽히고설켜 있는 와중에 작업이라는 한 줄기 직선을 끌어내려면, 일종의 교조주의가 필요합니다.
p15 나는 그저 사적인 견해들의 합이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하고 검증했기에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분명히 유효한 사실들의 합을 전달할 겁니다.
(…) 설명한다는 것은 기원을 발견하고, 사물들 간의 관계를 확인하고, 명쾌하게 밝히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p19 체스터턴은 술집 주인에게 혁명의 본래 의미는 어떤 동체가 폐곡선을 따라서 움직이다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일러 주지요.
(…) 예술은 그 본질상 구성적입니다. 혁명은 균형의 파괴를 뜻합니다. 혁명을 말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혼돈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술은 혼돈의 정반대입니다.
p22 쇤베르크는 자기에게 맞는 음악적 체계를 선택했고, 그 체계 안에서 자기 논리에 완벽하게 충실하고 완벽하게 정합적인 음악을 했습니다.
2. 시간 예술로서의 음악
p44 재즈 음악에서 솔로 무용수나 연주자가 고집스럽게 불규칙한 강세를 표현하는 동안에도 우리 귀는 타악기 주자의 규칙적인 리듬 반주를 놓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런 음악을 들을 대면 뭔가 어지럽지만 재미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나요?
우리는 이런 유의 인상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러한 리듬과 박자의 충돌 속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더 크게 다가옵니까? 바로 규칙성에 대한 강박입니다. 시간적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울림이 여기서 독주자의 색다르고 기발한 리듬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지요. 놀라움을 결정하고 예상치 못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 등시적 리듬이에요. 다들 잘 생각해 보면 알 겁니다. 그러한 리듬이 실제로 받쳐 주든가 가정적으로 전제되지 않는 한, 예상을 벗어나는 리듬은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어요.
p50 학교에서는 불협화음을 어떤 이행의 요소,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은 소리의 복합물 혹은 음정이기 때문에 우리 귀에 아름답게 들리려면 결국 완전 협화음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데생을 감상하면서 화가가 일부러 다 그려 넣지 않은 선들을 알아서 짐작해 내듯 우리 귀도 화음을 완성하고 미처 실현되지 않은 해결을 대체할 수가 있습니다. 이 경우, 불협화음은 암시의 역할을 합니다.
3. 작곡가의 창조적인 상상
p69 모든 창작은 그 기원에 일종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돌면 발견의 맛이 벌써 예상이 되지요. 창작 행위에서 미리부터 느껴지는 맛은, 이미 파악하였으되 아직 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미지의 것에 대한 직관을 수반합니다. 이 미지의 것은 주의 깊게 기법을 적용하는 수고를 통해서만 규명될 것입니다.
내가 주목한 음악의 요소들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내 안에서 깨어나는 이 욕구는 절대로 영감처럼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p85 바그너의 작품은 엄밀히 말해서 무질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질서의 결핍을 메우고 보충해야만 하는 경향에 해당합니다. 무한 선율이라는 체계가 그 경향을 완벽하게 드러내지요. 무한 선율은 시작할 이유도 없고 끝날 이유도 없는 음악의 영원한 '되어감(devenir)'입니다. 이처럼 무한 선율은 멜로디의 위엄과 기능 자체를 침범하듯 보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멜로디는 리듬이 붙은 악절의 노래, 즉 음악적 억양이거든요. 바그너의 영향으로 노래의 생명력을 보장하던 법칙들이 위배되었고 음악은 멜로디의 미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식의 작법도 아마 어떤 욕구에 부응했겠지요. 그러나 그 욕구는 음악 예술의 가능성과 양립 불가능합니다. 음악 예술의 표현은 이 예술을 수용하는 기관의 제약에 정확하게 비례해서 제한되기 때문이지요. 자기 자신에게 한계를 정해 두지 않는 작곡 방식은 그냥 색다른 기발함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 방식이 빚어낸 효과가 어쩌다 재미있을 수는 있어도 반복적으로 재연될 순 없죠. 기발함은 일단 반복되면 퇴색되게 마련이므로 나로서는 반복적인 기발함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네요.
(..) 창작인의 역할은 그가 받아들인 요소들을 체로 거르는 것입니다. 인간 활동은 그 활동 자체에 한계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통제되고 제한되고 수고가 가해질수록 더욱더 자유롭습니다.
내 경우를 보자면, 작업에 들어가면서 무한한 가능성들을 마주할 때 일종의 공포감을 느낍니다. 그럴 때면 나에게 뭐든지 허용된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된다면, 최선도 최악도 그러하다면, 어떤 것도 나에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노력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가 없을 테고 나는 그 무엇에도 기반을 둘 수 없으니 그때부터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겁니다.
p87 이런 유의 비정통적인 생각이 고르게도 퍼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술'은 평범한 활동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이든 다른 어떤 일이든 내구성 있는 기반은 필요합니다. 지탱이 불가능한 것은 움직임도 불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매번 어떤 시도를 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부과하는 그 좁은 틀 안에서의 움직임에 있습니다.
5. 러시아 음악의 혁신들
p145 여러분도 다들 이해하겠지만 현재 공산주의 러시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전반적인 콘셉트의 문제, 다시 말해 가치들의 이해와 평가 체계의 문제입니다. 받아들일 만한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선택과 분별, 실험과 그 결과의 종합, 달리 말하자면 결론이 되겠지요. 그 결론이 모든 삶, 모든 행위의 취향과 양식을 결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일반적 개념도 그 자체가 닫혀있는 원이라면 진정한 진전은 없다고 봅니다. (..) 그 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문제, 모든 대답이 애초에 정해져 있습니다.
6. 연주와 해석의 차이
p157 악보에는 작곡가의 의지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거니와 잘 수립된 텍스트 속에서 얼마든지 그 의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보가 아무리 꼼꼼하게 작성되어 있더라도, 템포, 뉘앙스, 연결, 강세 등이 전혀 애매한 구석 없이 지시되어 있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규정을 거부하는 비밀스러운 요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의 논법으로는 음악의 논법을 고스란히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비밀스러운 요소들은 경험, 직관, 한마디로 그 음악을 표현하는 사람의 재능에 좌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