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6 사실 의용군이 전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 규율의 힘 덕분이다. 1937년 6월 무렵까지는 계급에 대한 충성심 외에 그들이 전장에 그대로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개별적인 탈주자들은 총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따금씩 총살이 집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1000명이 병사들이 전선을 떠나기로 작정했다면, 그들을 막을 힘은 없을 것이다. 징집병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경우, 헌병이 없었다면 군대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은 전선을 지켰다.
p74 첫째, 프랑코는 엄격하게 말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비교될 수 없었다. 그의 봉기는 귀족과 교회의 지원을 받은 군사적 폭동이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특히 초기에는, 파시즘을 강제하려 하기보다는 봉건제로 복귀하려 했다. 따라서 프랑코는 노동 계급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도 적으로 두게 되었다. 이 부르주아지는 파시즘이 좀 더 현대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그 지지자로 변하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페인의 노동 계급이 영국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지키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프랑코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저항과 병행하여 분명히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 폭동이 일어났다. 어쩌면 그들의 저항은 주로 그 같은 폭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토지는 농민이 장악했다. 많은 공장과 대부분의 교통 수단은 노동조합들이 장악했다. 교회는 부수고, 사제들은 내쫓거나 죽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은 <데일리 메일>은 프랑코를 악마 같은 '빨갱이' 무리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자로 묘사할 수 있었다.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 전선 정부라기보다는 노동조합들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응대했다. 이어 공공 무기고에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쟁 끝에 얻어 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카탈로니아에서는 처음 몇 달 동안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들이 대부분의 실질적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은 주요 산업 대부분을 통제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일은 사실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이었다. 스페인 외부의 반파시스트 언론은 이 사실을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었다. 쟁점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로 좁혀졌다.
p81 전쟁과 혁명 발발 1년 뒤, 결국 중앙정부에는 우익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 우익으로의 전환은 1936년 10월, 11월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은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권력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친절을 보여 주지 않았다. 멕시코야 물론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가 지원 조건을 좌우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이 조건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혁명을 막지 않으면 무기도 없다.'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나아가 혁명적 요소들에 대항하는 첫 번째 조치는 카탈로니아 헤네랄리테로부터 통일 노동자당을 추방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소련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다.
p88 정치 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요한 정당은 셋뿐이었다. 통일 사회당(P.S.U.C.), 통일 노동자당(P.O.U.M.), 그리고 대충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통칭되는 전국 노동자 연맹(C.N.T.) - 무정부주의 연합이었다. 우선 통일 사회당부터 이야기하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통일 사회당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정당이고, 지금도 눈에 띄게 상승세를 타고 있다. / 통일 사회당의 '노선'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꼭 공산당의 '노선'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P.S.U.C.는 카탈로니아 공산당을 포함한 여러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연합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공산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고, 제3인터내셔널에도 가입했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형식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점과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어디에서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통일 사회당은 U.G.T.(노동자 총연합), 즉 사회주의 노동조합들의 정치적 기관이다.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이제 약 150만 명에 이른다.
(..) 전 세계의 공산주의 또는 친공산주의 언론에서 전파하는 통일 사회당의 '노선'은 이런 것이었다. / "현재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지금은 혁명을 계속 밀고 나간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
p90 통일 노동자당의 '노선'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이 노선과 달랐다. 물론 그 한 가지란 전쟁에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노동자당은 지난 몇 년 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여, 즉 실질적이건 표면적이건 간에 공산주의 정책의 변질에 반대하여 여러 나라에서 출현했던 반대파 공산주의 정당들 가운데 하나였다.
p92 전국 노동자 연맹-무정부주의 연합은 대략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지했다. (1) 운송, 방직 공장 등 각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직접적인 산업 통제. (2) 지방 위원회의 정부 지지, 그리고 모든 형태의 중앙 집권화된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 (3) 불주아지와 교회에 대한 비타협적 적대. 마지막 사항은 가장 불명확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원칙이 다소 모호하기는 했지만 특권과 불의에 대한 증오는 정말로 순수했다는 점에서 대다수의 이른바 혁명가들과 대립되었다. 철학적으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는 양극단이다. 실제적으로, 즉 목표로 하는 사회의 형태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주로 강조점의 차이이다. 그러나 그 차이 때문에 절대 화해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자는 늘 중앙 집권과 효율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 무정부주의는 스페인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때문에 두 정당은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월에 통일 노동자당이 바르셀로나에서 시가전에 뛰어들어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도 전국 노동자 연맹을 지지해야 한다는 본능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중에 통일 노동자당이 탄압을 당했을 때, 대담하게도 그들을 옹호하여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다.
p94 당시에 내가 왜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통일 노동자당의 관점보다 더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주의자에게는 분명한 실질적 정책이 있었다. 겨우 몇 달 앞만을 내다보는 상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분명 더 나은 정책이었다. 확실히 통일 노동자당의 일상적인 정책, 선전 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종결지은 것은 우리와 무정부주의자들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발맞추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얻고 또 그 당원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에 반대하여 중간 계급에게 호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