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족영화에서 주인공은 하나의 덩어리로서 가족이다. 아들의 시점에서 어머니나 아버지, 부모의 시점에서 자식이라는 개인이 가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사업을 경영하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위가 이 영화의 화자이자 회상의 대상이다. 영화에서 주되게 읽히는 감정은 한 구성원이 다른 이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기보다 인생에 내던져진 한 개체가 세상과 환경에 대해 느끼는 정서와 태도다. 막막함, 두려움, 설렘과 떨림, 야심, 절망, 고독, 작은 안도. 또한 영화 전반에 깔린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은 이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가족을 운영할 것인가, 다르게 말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두 대답이다. 이 대답은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아주 구체적인 수준의 '방안'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할 수 없는, 어느 입장이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아픈 갈등.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갈등이지만 어쩌면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
미국 이민자 1세대 가족이라는 특수한 소재가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임에도 서툰 감상이나 신파에 지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인 것 같다. 영화는 모든 가족 구성원을 찬찬히 고르게, 하지만 완전히 이입하지는 않은 채 조금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모든 영화는 만든 사람의 내면과 인격을 어느 정도로든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인데, 여기서 드러나는 감독의 성숙한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평가에만 그치지 않고 가족 전체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여타의 성장 영화들과도 다르다.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면서 '어머니의 성장'까지 그리는 영화는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이 부분에서 한예리의 연기와 캐스팅이 빛을 발하는데, 그의 외모와 존재감은 아직 여리고 세월의 풍파에 덜 깎여나간 젊은 어머니에 적합하고 묵묵하지만 섬세한 표정은 혼란, 내면에 축적되는 풍파의 잔해들, 변화와 성숙 과정을 모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나리'라는 아주 일상에 가까운 이 단어는 영화를 거쳐 환상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나타내는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다. 죽도록 매달린 밭에서는 작물이 죽어가고 불타지만, 그 뒤편에서 눈길도 주지 않았던 미나리는 잡초처럼 무심히 자라난다. 이러한 통찰도, 마지막 장면(또는 물가를 배경으로 한 모든 장면들)으로 이 통찰을 하나의 이미지로 집약한 것도 모두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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