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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s0mersault 2021. 8. 12. 08:18

- 이 극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수난기'다. 자신의 운명을 알지못한 어리석은 한 여인이 그 운명에 무참하게 휘둘리는 이야기. 그러나 문제는 (극의 관점에서는)이 운명조차도 방향을 상실했다는 것, 여인만큼이나 어리석은 대중의 광기와 무질서, 정념에 의해 이끌렸다는 것이다. 통상의 비극이 운명과 그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갈등이라면, 여기는 방향을 잃은 소요와 거기에 한번 맞서보지도 못한채 단숨에 파괴된 인간이 있다. 이건 좌절이 아닌 파괴다. 어리석은 인간에게는 반성과 변화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잔인한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하나? 내가 극을 두번 관람하면서 느낀 혼란의 원인은 이거였다. 한없이 마음이 아래로 굴러떨어졌지만, 이 감정이 '슬픔'인가? 슬플 수 있는건가? 저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원했고, 그래서 무엇을 잃었는가?

- '우리가 꿈꾸는 정의는 무엇인가', 포스터에 적힌 홍보 문구이자 슬로건이다. 프랑스혁명은 이런 질문을 충분히 제기할만한, 그만큼 다양한 접근이 필요한 복잡다단하고 입체적인 역사다. 그러나 극중의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이 질문에 걸맞는 복잡함이나 입체성을 갖지 못한다. 이 극이 제시하는 '다른 관점'이란 항간에 떠도는 저질스러운, 단편적인 음모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대중의 천박함과 우매함을 비웃지만 극의 관점도 그 천박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질문은 공허하게 던져지고, 이에 대한 답은 실마리조차 없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위의 질문은 이런 극에는 너무 과분하게 무거운 질문이다. 물론 모든 극이 무겁고 진지할 필요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이상이 걸려있었던, 한 세기의 역사를 마감하고 다음 장을 연 사건을 음모론으로 환원하는 건 그냥 게으르다.